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朝鮮通信使 ,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사의 구성은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등 하위 관직의 사람이 갔으며 화가,서예가를 포함하여 거의 500명에 달했다 德川家康는 조선의 문화를 매우 흠모하였다.
德川家康의 성리학의 선생님인 藤原惺窩는 德川家康를 가르칠때 韓服을 입고 가를칠 정도였다.. 대마도에서 에도(江戶)까지 직접 접대를 맡았던 다이묘[大名]는 33명이지만 그밖에 통신사행렬이 지나는 해로와 육로에 인접한 수많은 지방의 다이묘[大名]들이 백성을 國役 부과형식으로 동원했는데 그 수는 하루에 3,000명으로 방대했다.[britannica백과사전]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