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최후: 해방 후에도 이어진 왕손들의 비극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은 명성황후와 후궁들로부터 9남 4녀를 얻었다고 전해짐.
그러나 대부분은 어릴 때 죽고, 그 중 성인인 된 자녀는 모두 4명. 4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순종(본명: 척拓, 명성황후의 아들): 조선의 마지막 왕(27대). 자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
의왕(본명: 강堈, 귀인 장씨의 아들):왕세자가 되진 못했으나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
영왕(본명: 은垠, 귀인 엄씨의 아들):[/b] 조선의 마지막 왕세자
덕혜옹주 (귀인 양씨의 딸):[/b] 일본 억류의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다 사망

조선황실 가족 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고종, 왼쪽에 순종과 세자이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영왕이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순종비 윤황후와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있다.
일제의 조선왕조 유린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 순종의 동생인 이은(영왕)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일제는 조선 왕조 혈통을 끊기 위한 노력으로 순종을 제외한 모든 왕실 자제들을 일본인들과 강제 혼인 시킨다. 11세의 황태자 이은을 일본에 볼모로 끌고 갔으며, 1920년 이은의 이모뻘이었던 일본 나시모토 궁가의 왕녀 마사코와 혼인 시킴. 마사코는 결혼 후 이방자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한국 국적으로 귀화.

영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 이방자 여사는 평생 심신의 고통을 받는 남편을 극진히 보살폈으며, 정신병에 시달리던 덕혜옹주를 친자매처럼 돌봐줌. 한국에 귀화 후 장애우를 위한 자선 사업을 벌이는 등 한국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보임.
이방자 여사는 훗날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아이를 못 낳을 몸이라 여긴 일본이 조선 왕가를 절손시킬 목적으로 영왕과 혼인을 시켰지만, 후에 아들을 낳자 나의 불임을 주장했던 전의 3명을 모두 처형했다."
의왕 이강의 장남 이건은 일본 해군대좌의 딸 히로하시 세이코와, 덕혜옹주는 쓰시마 섬의 도주인 쇼다케시 백작과 정략 결혼함.
1926년 순종 사망 후, 영왕 이은은 일본에 의해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얻지만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해방 후에도 계속 일본에 머물게 됨.
일제는 한일합방 후 조선의 황실을 일본 천황 아래로 격하시킴. 갑오경장 이후 황제로 칭해졌던 순종은 "창덕궁 이왕", 그 외에 고종의 직계 자손들은 "친왕"의 호칭을 얻는다. (모두 일본 천황의 세손이라는 뜻. 이때부터 일제는 조선을 이씨 조선=이조라고 부름.)

이 오얏꽃 문양은 1897년 대한제국 설립 후 황실의 상징이었음.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이 명백한 주권 국가임을 나타낸 상징물로, 일제가 조선 왕조를 비하하기 위해 이 문양을 억지로 사용케 했다는 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임.
뿐만 아니라 일제는 왕실의 인사권과 예산 편성권까지 빼앗아 천황의 통솔 아래 예속시킨다. 순종의 서거 후엔 조선 왕족의 족보까지 개작해 명실상부하게 조선왕실을 천황의 일족으로 만들어 일제가 주장하는 소위 '한일합방의 적법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해방 후의 비극
이승만 정권은 독립 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위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보상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조선 왕실 후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베풀지 않는다.
1945년 해방 후, 일본에 억류돼 있던 영왕은 귀국하려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저지 당함. 게다가 이승만 정권은 조선에 남아있던 왕족의 왕실재산 뿐 아니라 개인 물품까지 강제 국유화했고, 왕가 친인척을 왕궁에서 쫓아냄. (이는 고종 황실에 대한 이승만의 해묵은 원한 때문으로 풀이됨. 이승만은 젊은 시절 독립 운동을 할 당시 고종의 실정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가한데다 왕정을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때문에 그는 고종 내각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히고 옥살이를 하게 됨. 이승만은 고종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것으로 생각, 오랜 기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음.)

창덕궁 낙선재. 조성왕조의 마지막 가족들이 머물렀던 터. 조선왕가는 해방 후 이 얼마 안되는 공간에 살기 위해 이승만 정권과 오랜 싸움을 벌여야 했음.
이때의 충격으로 영왕은 건강이 크게 악화됐고, 1963년 (마침내) 귀국할 당시엔 뇌혈전증으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음. 결국 영왕은 한국 땅 한번 걸어보지 못한 채 7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함. 이로서 공식적인 조선 왕조의 명맥은 끊김.
한때 일본에서 천황의 황태자비로 거론되던 이방자 여사는 조선 왕세자와 억지 정략 결혼을 한 후, 영왕 사이에 낳은 아들이 의문의 죽음까지 당하며 고난을 길을 걸어야 했음. 게다가 한국인으로 귀화 후에도 반일 감정에 시달리는 등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음.
이방자 여사는 일본인이었지만 남편과 한국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 심신의 고통을 받는 남편을 극진히 보살폈으며, 정신병에 시달리던 덕혜옹주를 친자매처럼 돌봐주었음. 한국에 귀화 후 말년까지 장애우를 위한 적극적인 자선 사업을 벌이기도 함. 1989년 사망. 이방자 여사는 정부에 의해 궁궐에 기거하도록 허락 받은 마지막(가장 오래 살아남은) 왕족이었음.
영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살아남은 유일한 자손은 이구(李玖). 1932년 출생.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 여성 줄리아와 결혼한 뒤, 32세에 귀국. 그러나 귀국 뒤 왕세손이라는 이유로 짊어져야 할 부담에 환멸을 느끼고 일본으로 떠남. 이곳에서 수십 년간 귀국을 거부하다가 1996년 재귀국, 전주 이씨 종친회 회장직을 맡은 바 있다. (
월간 조선 2005년 6월 기사에서 줄리아 여사의 최근 모습을 볼 수 있음.) 2005년 7월 일본에서 사망.
이승만 정권의 가혹한 대접으로 조선 왕손들은 곤궁한 생활을 면치 못함. 의왕 이강은 독립 운동을 지원하며 계속 한국 땅에 남았으나 1955년 가난 속에 숨졌으며, 덕혜옹주는 일본 억류 생활의 충격에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1962년이 되서야 귀국. 1989년 사망함.

의왕 이강. 고종의 5남으로 태어나 총명하고 의기가 강한 인물로 자람. 세자 책봉이 되지 않은 채 일제의 엄한 감시를 받으면서도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함.

순종의 부인 윤비. 조선의 마지막 중전이었던 그는 일제강점기 때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때 창덕궁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며 호통쳐 내쫓는 등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해방 후 이승만 정부와 외로운 싸움 끝에 창덕궁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임. 1966년 낙선재에서 숨을 거둠.
의왕 이강 슬하엔 여러 자손이 있었으나 대부분 미국으로 이민을 갔거나 한국에서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음. 덕혜옹주의 유일한 혈육인 정혜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 왕족의 나라 사랑 의왕 이강과 영왕 이은 모두 이름 뿐인 조선 왕가의 후손이었으나 조국에 대한 애정과 독립에 대한 의지는 매우 강했음.
의왕은 일본으로부터 집요하게 입국을 강요 받았으나 끝까지 조국을 등지지 않았음. 의왕과 영왕은 모두 여러 차례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려고 했음. 이들의 망명이 성공했다면 임시정부의 독립 투쟁은 공식적인 정통성을 부여 받아 훨씬 세력이 강화될 수 있었기에, 일제는 의왕과 영왕의 모든 행동을 제한하는 등 철저한 감시를 폄.
해방 후, 왕가의 사적 재물까지 국유화 한 이승만 정권에 대해 영왕의 주변인들은 소송을 제안했지만, 영왕은 조국을 상대로 소송은 있을 수 없다며 모든 사유 재산이 박탈당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