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维克多•崔 Виктора Цоя------苏联摇滚之父

이름 : 빅토르 최

본명 : Victor Choi
생년월일 : 1962년 6월 21일
사망 : 1990년 8월 15일
출생지 :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
학력 : 시립 제61기술전문학교
출연영화 : 이글라, 아싸
수상 : 1989년 황금의 쥬크 영화제 최우수 배우 [이글라]


화제 : 한국계 러시아 3세이자 록가수겸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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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알렉산드르 최, 부인 마리아나 최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 출생. 한국인 2세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인 사이에 출생하여 5살 때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져 세로브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교내에서 ‘팔라타 세스토이(제6병동)’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반국가적인 노래를 연주한다는 이유로 퇴교당하였다.

그 뒤 시립 제61기술전문학교에서 목각을 전공하였다. 1982년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 《혈액형》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여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글라》라는 영화에도 출연하여 1989년 1500만 명의 관중을 동원, 그 해 오데샤에서 열린 황금의 쥬크영화제에서 최우수 배우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의 음악성향은 펑크록 스타일에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노래로 소비에트 전역의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라트비아공화국 리가에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자 소비에트 전역에서 5명의 여자가 자살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겐트 등지에 생겨났다.

또한 모스크바 예술의 거리인 아르바트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벽이 생기기도 하였다. 1993년 모스크바 콘체르트 자르 앞 스타광장의 명예가수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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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익은 열매, 사신(死神)은 우리를 먼저 덮칠 것이다." - 빅토르 최

라트비아 공화국 수도 리가에서 뮤직비디오 촬영과 휴식을취하고 있던 빅토르 최는 1990년 8월 15일 낚시를 즐기고,
자신의 승용차로 호텔로 돌아오던 중 슬로까따우시 도로에서 마주오던 이카루스 대형버스(관광버스보다 약간 더 큰 버스)와
정면 충돌했다.
빅토르 최의 승용차는 충돌 후 10미터나 밀려나 처참하게부숴져 버렸고, 빅토르 최는 핸들에 가슴을 찍힌 채, 그 자리
에서 절명했다. 이로써 그의 28년 짧은 생애는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고현장에는 자동차 경적소리만 무심히 울리고 있었다.
아이니컬하게도 한국민들이 억압을 벗어나 자유를 찾은 광복절에, 자유와 저항를 노래하던 우리의 피를 이어받은
구소련의 마지막 영웅은 영원한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몇시간 후, 빅토르 최는 시립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진보파와 보수파간의 극심한 갈등속에 있었던 소련의상황은 빅토르 최의 교통사고가 소련 해체에 불만을 품은 강경파 KGB에 의한 암살이라는 추측을 낳았고, 사고조사 기간이 극히 짧고, 사고 운전자가 너무도 빨리 풀려나 행적을 감추는 등,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러분은 이 대목에서 한가지 의혹을 가질 것이다.
빅토르 최는 정치인도, 혁명가도, 군인도 아닌 록그룹의 리더였을 뿐인데, KGB가 암살까지 하려했을까? 그 답은 그가 단순히 록그룹 리더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러시아 펑크록이었다.
펑크라는 장르는 그 특성상 가사를 매우 중요시하는 장르이다.
리듬은 단순반복이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서 날카로운 노랫말에 자유와 저항이라는 메시지를 실어서 쏴댄다.
그중에서도 특히, 빅토르 최의 펑크록은 한번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다른 펑크록처럼 그의 음악도 가사를 굉장히 중요시 하는데, 그 파괴력의 강도가 엄청났던 것은 단순한 노래의 가사가 아닌, 언제나 신비한 동양적 체취가 물씬 묻어나는 한편의 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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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저항"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빅토르 최,
일부에선 그의 노래가사를 러시아의 요절한 천재시인 예세닌
(Esenin, Sergei Aleksandrovich, 1895.10.19 ~ 1925.12.28)의
시와 비유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시는 뛰어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그 힘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노래는 구소련 인민들의 가슴에 자유
와 저항의 화신으로써의 그를 깊게 아로 새겼다.
그것은 역사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웅의 이미지, 기존의영웅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구소련 마지막 영웅의 이미지였다.
보수파(대표적으로 공산당) 입장에서는 당연히 빅토르 최는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위험 인물로 파악되었을 것이고, 그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강력한 파장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보수파(대표적으로 공산당)들이 죽도록 싫어하는,글라디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며, 제 2의 혁명 표방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영향을 끼친 다섯명 중의 한명으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빅토르 최와 KINO를 직접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힘주어 말했다.
"동지, 페레스트로이카와 인민을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함께 일합시다."
울리짜 블리히나 15번지 보일러실 화부출신의 까레이스키 3세 빅토르 최가 또 하나에 러시아 혁명사의 별이 되는 순간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그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의 노래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보수파의 대표적인 강경파 KGB로써는 그를 암살할 이유가 충분했다.
빅토르 최 사망, 바로 다음날,"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구소련 전체를 흔든 빅토르 최 사망기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모든 진보적 신문들은 그의 사망을 대서특필했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그러나, 보수파의 대표적인 신문인 공산당 기관지들은 그의사망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났고, 보수파에 의한 빅토르 최 암살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어 갔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소련 전역에서 5명의 여인이 외로운 그의 저승길에 동반자가
되기 위해 자살했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조그만 시립병원은 인산인해를 이룬 추모인파와 팬들의 눈물과 장미꽃으로 뒤덮였고,
자신들의 신이라 믿었던 이의 주검앞에 광적으로 흥분한 팬들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 장례식
이 며칠씩 연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관련 보도자료.


[음악]‘러 젊은이 우상’ 빅토르 최 추모비 제막


“살기 위해서 죽음이 있고 기다리기 위해서 사랑이 있다.”15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35㎞ 떨어진 슬로카탈시 대로변.
12년 전 러시아의 전설적인 한국계 록가수 빅토르 최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곳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팔짱을 낀 생전의 최의 모습을 형상화한 추모비에는 대표곡인 ‘전설’의 유명한 가사 한 소절이 새겨졌다.
이 추모비는 최의 동료 가수들이 자선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세워졌으며 러시아의 저명한 조각가 루슬란 베레샤긴과 아미란 하벨라슈빌리가 제작했다.
현지 언론들은 추모비 제막식에 유족과 최가 이끌던 그룹 키노의 옛 동료 등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카자흐스탄에서 한인2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최는 80년대 초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해 80년대 후반 구소련이 해체될 무렵 슬라브 특유의 우울한 선율에 저항과 자유의 메시지를 담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최의 인기는 사후에도 여전해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추모의 벽’이, 러시아 카잔과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등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다.
그러나 추모비가 세워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생전에 고국 공연을 꿈꿨던 최는 광복절인 8월15일 29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빅토르 최 부인 사망 [동아일보 2005-06-29 03:16:00]
[동아일보]
1980년대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한국계 러시아 록 가수 고 빅토르 최 씨의 부인이 27일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러시아 언론이 보도했다. 향년 46세. 마리야나 최 씨는 빅토르 최 씨가 결성한 록그룹 ‘키노’에서 행정업무를 맡다가 1984년 2월 결혼했다.





러시아 록의 전설 ‘빅토르 최’ 영화로 부활

러시아 록의 전설 ‘빅토르 최’ 영화로 부활
28세 요절 고려인… “한 편 만들어 달라” 부인이 유언
내달 14일 모스크바서 개봉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인 고려인 빅토르 최<사진>에게 헌정하는 러시아 영화가 제작됐다. 제목은 ‘프로스터 호체쉬 트이 즈나치’, 우리말로 ‘네가 알기 원하는 것’이다. 사망한 지 16년이 됐지만 러시아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친 빅토르 최의 생전 발자취를 따라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작기간 1년 6개월에 상영시간 1시간5분으로 다음달 14일 모스크바에서 일반에게 개봉될 예정이다.

록가수였던 빅토르 최는 이번 영화에선 다섯 살 때부터 거주한 옛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고양이와 함께 춤추는 댄서로 등장한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공연했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생했고, 공산주의가 붕괴되는 당시 혼란 상황을 오버랩시켰다.

빅토르 최는 러시아에서 인기 절정이던 1990년 공연차 들른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자동차 사고로 28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러시아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에다 공산주의 시절 저항적이며 자유 지향적인 펑크록 스타일의 노래로 소련 젊은이들로부터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그의 요절에 충격을 받은 러시아 여성 팬 5명이 자살했고 러시아 내 타타르 공화국 수도 카잔, 우크라이나 키예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다. ‘혈액형’ ‘마지막 영웅’ ‘변화’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영화 제작자 드미트리 네즈베츠키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고, 빅토르가 이끌었던 록그룹 ‘키노’ 공연을 보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모스크바에서 밤새 열차를 타고 다녔다”고 말할 정도의 열성 팬이다.

이번 영화는 2005년에 작고한 빅토르의 부인 마리아나 최가 “빅토르에겐 영화 한 편이 없다”며 네즈베츠키에게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유언,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모스크바=권경복특파원





출처: 봉쥬르라이프

LAST HERO" 빅토르 최(Виктора Цоя)

빅토르 최가 사망하자 그룹 KINO는 해체되었다. KINO의 역량 중 80% 이상이 빅토르 최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사, 작곡, 편곡, 앨범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빅토르 최 홀로 했기에, 그가 없는 KINO는 존재할 수도 존재할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빅토르 최가 죽고, KINO가 해체되었지만, 루즈니끼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그가 약속했던 새로운 앨범 <Черний(쵸르늬)>는 유작앨범이 되어 발표되었다. 쵸르늬는 러시아어로 검정(BLACK)을 뜻하는데, 비틀즈의 화이트앨범을 "하얀앨범"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빅토르 최의 쵸르늬 앨범도 "검정앨범"이라 하지 않고, 명칭 그대로 쵸르늬 앨범이라고 칭한다.

이 앨범에는 "여름", "뻐꾸기", "개미집", "별", "황금의 나날"등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당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던 소련을 상징하듯이 힘차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우울한 느낌이 담겨있고, 빅토르 최 자신의 자아성찰적인 요소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최 사망 10주년 당시 그의 마지막 앨범을 소장하려는 팬들로 인해 재고가 바닥나고, 판매가의 10배를 훨씬 상회는 가격으로 암거래 되는 등, 엄청난 호응 속에 그와 KINO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빅토르 최는 마지막 유작앨범이 되어버린 <쵸르늬>까지 총 10장의 공식앨범과 <이글라>, <아싸>를 포함한 총 4편의 영화를 세상에 남기고, 우리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빅토르 최의 무덤은 페테르부르크 보코슬로 스코야 클라드비세 묘지에 있는데, 그 무덤 앞에는 인상적인 추모비가 서있다. 상아빛 대리석 받침위에 검은 오석기둥이 힘차게 솟아있고, 그 위로 그의 초상이 조각된 청동이 상징적인 반원 모양으로 올려져 있는데, 이 추모비는 평소 그를 존경하던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페테르부르크의 저명한 조각가들에 의해 헌정된 것이다.

그의 사후 얼마지나지 않아 빅토르 최라는 이름의 거리가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겐트 등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특히 모스크바 예술의 거리인 아르바트 2번지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벽 (일명 "통곡의 벽")과 제단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아르바트 2번지 빅토르 최의 벽 (통곡의 벽) 앞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모습이 담겨진 뱃지를 달고, 그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벽에는 빽빽한 추모글로 가득차 있다.

"빅토르! 너는 영원히 우리의 심장에 함께 있다."
"빅토르! 너는 우리의 생활방식이다."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는 몰라도,
빅토르 최는 우리를 바꿨다."

그의 힘은 이렇듯 그들의 가슴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도, 매년 8월 15일 이면, 그의 기일을 기념해 빅토르 최 추모제가 열린다.

빅토르 최는 1993년 모스크바 콘체르트 자르 앞 스타광장의 명예가수의 전당에 소련의 영원한 인민가수 브소츠키 다음으로 헌액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의 빛나는 별로써 소련 역사를 움직인 13인의 위인 중 한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자유를 향한 저항의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히며, 자유를 노래한 음유시인 빅토르 최.

그는 체제와 전쟁을 버리고 자유를 찾자고 외치며, 변화를 요구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록그룹 "윤도현 밴드"가 리메이크한 "혈액형" 의 나레이션 부분에서 윤도현은 이렇게 외친다.

"빅토르의 노래가 들린다. 싸늘한 그의 무덤 앞에 더 많은 빅토르가 모여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지금도 그의 노래가 끝나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

빅토르 최는 죽었어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자유를 향한 외침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싸늘한 빅토르 최의 무덤을 때론, 공중 화장실에서, 때론 천막 안에서 지키며 더 많은 빅토르를 찾아 울부짖고 있다. 그의 노래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자유를 꿈꾸게 할 더 많은 빅토르를 찾게 하기 위함인 동시에, 자유를 향한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부른 노래 중 이런 가사가 있다.

"만약 다 잠든다면 누가 노래를 부르겠는가?"

러시아인들의 가슴에 빅토르 최와 페레스트로이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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